2024년 한국외대 용인캠퍼스가 영어·중국어학과 신입생 모집을 중단했습니다. 덕성여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이 통번역 관련 학과를 통폐합하고 있습니다. 번역 업체는 직원을 7명에서 4명으로 감원했고, 프리랜서 번역가의 시간당 단가는 20% 이상 하락했습니다. 제가 20년 가까이 제2외국어를 공부하며 쌓아온 노하우가 AI에게 순식간에 흡수되어 전 세계로 퍼지는 걸 보면서, 허무함과 동시에 복잡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통번역 시장을 재편한 MTP와 실시간 AI 통역
MTP(Machine Translation Post-Editing)는 기계가 먼저 번역하고 인간은 교정만 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Post-Editing이란 기계 번역 결과물의 오류를 사람이 수정하고 다듬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이 방식이 도입되면서 번역 단가가 30% 가까이 절감되었고, 번역가들은 단순 교정자로 역할이 축소되었습니다.
실제로 10년째 해외 의료용품을 수입해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사업자는 3년 전부터 전문 번역 업체 의뢰를 대폭 줄였습니다. 일본 물류 회사와 주고받는 계약서나 제안서를 생성형 AI로 번역했는데, 오히려 전문 업체보다 더 정확하고 전문가적인 번역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법률·의료처럼 단어 하나하나가 민감한 분야에서도 AI 번역이 문제없이 작동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출처: KBS 뉴스).
지난해 경주 APEC CEO 서밋에서는 실시간 AI 통역 서비스가 실제 활용되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엔비디아 젠슨 황 등 주요 인사의 연설이 시차 없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미디어 센터에 제공되었습니다. 현재 이런 실시간 통역 기술이 적용된 컨퍼런스가 200건 이상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AI 통역의 상용화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지 체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외국인 동료와 협업하는 환경에서 일하면서 느낀 건, 회화 능력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주업무가 통번역인 사람들의 입지는 급격히 좁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3외국어를 업무에 써먹을 때 AI 번역 덕을 톡톡히 봤지만, 동시에 20년 가까이 공부한 제 노하우가 몇 초 만에 AI로 대체되는 걸 보면서 참 뭐라 말하기 어려운 심정이었습니다.
통번역학과 폐지와 언어교육의 미래
통번역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인서울 대학에 진학해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학점도 챙기며 노력했던 한 지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4~5년 전만 해도 통번역대학원 진학은 충분히 경쟁력 있는 선택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만에 산업 구조가 완전히 재편되면서, 그 노력이 무색해진 상황입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프리랜서 시장을 조사한 결과, 챗GPT 출시 이후 번역 분야의 시간당 금액이 20% 이상 감소해 전 분야 중 가장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출처: 한국고용정보원). 여기서 시간당 금액이란 프리랜서가 한 시간 작업해서 받는 평균 수익을 의미하는데, 이 수치가 20% 넘게 떨어졌다는 건 단순히 일감이 줄어든 게 아니라 업계 전체의 수익 구조가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언어 교육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언어는 번역이 돼도 그 안에 담긴 컨텍스트(맥락)와 배경이 되는 문화는 번역되지 않습니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건 단순히 단어와 문법을 익히는 게 아니라,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사고체계의 코어(핵심)까지 함께 배우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컨텍스트란 문장이 사용되는 상황적 배경과 화자의 의도를 포함한 전체적인 맥락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어의 '수고하셨습니다(お疲れ様でした)'를 영어로 직역하면 'You must be tired'가 되지만, 실제 의미는 격려와 감사가 섞인 인사입니다. AI는 이런 문화적 뉘앙스를 번역할 수는 있어도, 그 뒤에 깔린 일본 사회의 위계 문화와 배려 정신까지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통번역학과가 사라지고 언어 교육이 축소되면, 타국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도 함께 줄어듭니다. 기술이 언어 장벽을 낮춰주는 건 분명 긍정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언어에 담긴 문화적 소양까지 함께 사라진다면 그게 과연 진정한 의미의 소통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저는 외대 통번역학과 출신으로서, 이 변화를 단순히 산업의 문제로만 보기 어렵습니다. 언어를 매개로 서로 다른 문화권 사람들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 자체가 줄어드는 건 아닐까, 그런 우려가 남습니다. AI가 번역해주는 세상은 편리하지만, 인간이 직접 언어를 배우며 얻는 통찰과 공감은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언어 교육은 번역 기술이 아닌, 문화 이해와 인간적 소통 능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재정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제안해봅니다.